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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

2017 박근표춘화-부산예술(강선학 평론)

 

                                             

 

 

박근표 春畵 2017.11.27.-12.03 해오름 갤러리

즉각 소진되는 심연

 

“‘에로티즘이란 자기 존재를 문제 삼는 인간의 의식안의 어떤 것이며 에로티즘에 관한 논의는 인간의 본질에 관한 논의라고 한다. 박근표의 춘화는 선정적이지만 습하지 않고, 햇볕에 잘 말린 홑이불처럼 칼칼하고 가볍다. 민망하지만 숨길 정도로 음란하지 않고, 어느 곳, 어느 때 가리지 않는 통음의 이 장소는 밝고 가볍다. 단순한 춘화나 기존춘화를 재해석 하거나 선정적 호기심으로 보아 넘기기에는 여러 가지 생각할 것을 던진다. 너무 많은 이미지와 동영상들이 나도는 세태에 비하면 이런 정도의 그림은 농담 사이에 끼이는 삽화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노골성과 대담함, 거침없는 성희의 드러냄은 일정한 표정의 반복과 상투적인 묘사로 형상화된 비현실적인 모사는 포르노그래피가 던지는 현실적 이해를 묻게 한다. 배위에서든, 야외에서든, 기방에서이든 그곳은 연극무대처럼 독립된 공간이면서 공개된 어떤 것으로 드러난다. 은밀하지 않다. 사적 은밀함일 수밖에 없는 체위와 공간이 노골적으로 드러남으로 통음은 연극적 드러내기의 한 순간이 되고, 그 연극은 사밀한 쾌락이 아니라 공개된 쾌락으로서 개인과 사회, 은밀한 욕망에 대한 공공의 질문이 되고 만다. 그가 확보하고 있는 통음의 장소가 만드는 가볍고 밝은, 그러나 이 세상 한바탕 浮世畵인 것을, 그저 세상의 눈높이로 음란한 소극으로 보기에는 너무 진지하다. 음란이 평범화된 이 시대의 이 작업을 그저 춘화로만 볼 것인가 하는 의문이다.

 

기존하는 일본 춘화를 크게 다르지 않게 손질을 가해 재해석한다. 배경이 없는 전형적 포르노는 그것이 가진 현실적 배경을 떼어냄으로 행위 자체를 사물화 시킨다. 현실의 재현이라기보다 하나의 독립된 기표다. 느닷없이 만나게 되는 혹은 예견된 성기는 인간의 성기라는 몸의 일부가 던지는 구체성이기보다 성기라는 기호의 만남이다. 사물적 재현이 아니라 언어적 기호로서 성기다. 현실적 장면의 관음이기보다 도리어 내면에 있는 성에 대한 인간적인 의미들, 혹은 그것을 일탈하는 기호들의 세계이자 그 기호들이 만드는 가상의 세계가 드러내는 인간의 욕망, 잘 조절된 그러면서 일탈을 통해 결핍을 충족시키는 것이다. 그림 속에 등장하는 여자들의 얼굴이나 표정이 거의 같다. 같은 기표들의 반복된 제시다. 기호로서 의미를 가질 뿐 기표로서 끊임없이 현실에서 미끄러진다. 그리고 반복해서 그 기표들이 실제를 피해간다. 실제이기보다 기표라는 이유다. 윈본 없이 복제된 장면인 셈이다. “재현은 기호와 실재의 등가의 원칙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복제로서의 시물라시옹은 재현과는 정반대다. 어떤 실재의 지시도 아니다. “즉 더 이상 실재와 교환되어지지 않으며, 어느 곳에 지시도 테두리도 없는 끝없는 순환 속에서 그 자체로 교환되어지는 시물라크르이다.” 배경이 없는 춘화는 현실의 재현이기보다 그저 하나의 기표적인 배열 혹은 조합이며, 현실을 원하기보다 하나의 쾌락으로 현실을 비껴갈 뿐이다. 시간과 공간을 소진시켜갈 뿐이다.

 

                                                                                         

 

 

그것이 음란한 이미지인 것은 분명하지만 현실재현이기보다 하나의 기호에 가깝다. 현실의 구체성이 없다는 측면에서 그렇다. 그런데 박근표는 여기다 배경을 챙겨 넣는다. 배경이 생기면 통음의 행위는 장소성을 갖는 현실경으로 바뀐다. 단순한 기표가 아니라 하나의 사건이나 의미가 된다. 말하자면 현실의 한 장면을 잡은 사건인 셈이다. 사건은 그것에 대해 질문하게 한다. 그것이 무엇인지 왜 그런지, 어떤 영향이 있으면 무엇을 생각하게 하고 무엇은 드러내려 하는지에 대해서. 그리고 배경은 은유나 은폐의 역할이 아니라 그 장면을 현실로서 체감하게 하고 더 실감나게 한다. 포르노가 아니라 통음의 실제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사실 위험하고 난삽한 현실태를 표상하는 셈이다. 그렇다고 고발하고 비판하는 의미를 읽어내기에는 상투적인 통음의 장면일 뿐이다. 상투성은 온갖 의미들을 단순화시켜 버린다. 그래서인지 그 그림 앞에서면 에로틱한 장면이긴 해도 가볍고 부드럽게 넘어간다. 음탕한 한 장면을 엿보는 것이 아니라 그럴 듯한 장면에 민망하지만 그저 웃고 말 뿐이다.

그 웃음은 낭패한 순간의 은폐나 기피, 딴청부리는 제스처로 보기 힘들다. 도리어 이즈음의 영상이나 이미지에 비해 턱없이 모자라는 모사와 왜곡 때문에 희화화된 데서 오는 거리감과 옛그림을 재현하는 데서 오는 안도감에 다르지 않다. 그림과 현실의 기묘한 경계에서 현실의 재현도 그저 주관적인 상상도 아닌 장면이 만드는 거리 때문이다. 그것은 나와 상대 사이에 기묘하게 드러나는 자신에 대한 존재와 결여의 불확실함이다. “성행위의 내적 의미는 적어도 그것의 심연으로 되돌려보내져야 한다.” 그곳에서 드러나는 욕망의 주체를 자신으로 인정하기도 부정하기도 힘든 경계에서 자신을 보아내는 것이다. 그 불확실함에도 불구하고 온 몸으로 느끼는 순간이다.

 

통음의 장면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내 의식 속의 생성적 욕구에 대한 확인이자 그 순간 속악하게 전치되는 장면에서 자신을 웃으며 보게 된다. 생각지 못한 어떤 것과의 조우이다. 정신이니 가치니 도덕이니 하는 규범이 한순간 자리하지 못하는 시간과 공간을 만나는 것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동물과 다르지만 그와 다르지 않고 엄숙하거나 가학적이지 않는 심연을 만난다. 곤충들의 교미를 우연히 보게 되듯 인간의 통음을 우연히 보면서 편안해지는 엿보기의 순간이다. “비록 우리가 동물과는 다른 정신적인 존재라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 내부에 버티고 들어앉아 있는 동물성이 종종 우리를 엄습함을 느낄 수 있다. 정신의 반대편에서 성적과잉이 들끓는다. 흥분이 극에 달하면 인간도 짐승 이상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정신과는 전혀 다른 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성행위는 어떤 의미에서 보면 사물인 것이다. ” 과잉의 에너지가 들끓고 있지만 음습하거나 폭력이 아닌 드러냄을 보게 된다. 본다는 점에서 그것은 사물의 만남이다. 의미가 아니라, 그저 그 순간 자신의 존재함과 결여를 함께 보는 것이다. 그의 춘화는 의미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연출하면서 소진되어 버리는 장면이다.

 

연출되고 소진된다는 측면에서 광고문안 같다. “이 모든 것들이 정확히 포르노에서 섹스처럼, 즉 그걸 믿지 않으면서, 지쳐빠진 동일한 외설성을 가지고서, 연출되는가를 보라. 그 때문에 차후로는 광고를 언어로서 분석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다박근표의 춘화는 의미의 세계가 아니다. 소진하는 세계다. “마치 포르노가 과장된 섹스의 허구인데, 섹스는 그 조롱 속에서, 조롱 때문에 소비되고, 이것은 곧 섹스의 과장되고 기괴한 바로크적 승천 속에서 섹스의 덧없음에 대한 집단 공연이듯이 그리고 그것은 모든 사회적 활동에 대립하는 것인 동시에, 단지 그것 자제를 목적으로 하는 이 시대를 움직이는 광기어린 욕망임에도 분명하다. 그 연극적 무대 위에서 연출되고 소진되는 것이다. 마치 에로티즘은 열광, 착란, 광기 따위로 고조되며, 제사나 향연, 놀이, 전쟁, 범죄 또는 예술이나 종교성을 지향한다. 가장 숭고한 예술이나 종교 세계의 밑바닥에도 에로티즘이 있으며, 가장 비참한 범죄나 폭력 세계의 밑바닥에도 에로티즘이 자리잡고 있다 고 하듯 그것은 광고처럼 의미의 축적이 아니라 소진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의 춘화, 대부분의 춘화가 그렇지만 그림을 들여다보는 나는 있지만 들려다볼 타자가 없는 장면들의 연속이다. 타자가 없다는 말은 상실이며 허망일 뿐이다. 타자의 부정은 나의 부정이다. 내가 없는 그것은 이 시대의 우울, 자기기만의 연속이 보여주는 부세화(浮世畵)의 세상을 보여준다.

 

                                                                           

 

 

 

인간의 성에 관한 진리는 결코 찬란한 과학의 빛과는 다른 한 줄기 내밀한 빛으로서, 오히려 욕망과 충동에 사로잡힌 사람이 자신의 충동을 전혀 돌아다보지 않은 채 거기에 한껏 매몰될 때 이해될 수 있는 진리이며, 사물을 파악하는 과학적 방법으로는 접근이 불가능한, 그래서 오직 침묵과 금기를 통해 접근이 가능한 역설적 진리이다 박근표의 춘화는 이 시대 새로운 에로티시즘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자기 존재를 문제 삼는 인간의 의식 안의 어떤 것의 만남이다. 무겁게 드리운 언어의 사슬 사이로 자신을 읽게 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광고의 문구에 가깝게, “깊이가 없고 즉각적이며 즉시 잊어버리기 때문에 광고양식 속으로 흡수되듯 우리에게 우리들에 대한 질문을 요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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